
※CoC 타이만 시나리오 1001일의 기록자에게, 자립법개론, 잠자는 숲속의 당신과 관련된 이야기로 이루어져 있어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하나,
사헬라는 티르를 처음 만난 날을 기억한다.
용이자 한 제국의 수호자로 살아가는 삶은 제가 사랑하기 마땅한 이들에게서 경외와 숭배의 시선을 받는 삶이라고 사헬라는 생각했다. 그게 좋은 일이냐고 한다면 어떠한 답도 떠오르지 않았다. 이유는 단순했다. 의무에 감정을 부여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었다. 감정이 들어가면 예외가 생기고, 예외가 생기면 흔들릴 수밖에 없다는 결론이었다. 그러니 사헬라는 자신이 지켜야 하는 이들을 의무적으로 사랑했고, 사랑하는 자들을 의무적으로 지키고자 하였다. 그래, 지금 생각해보면 그 사랑은 분명 제 감정에 따라 움직이던 마음이 아니라 사랑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세뇌와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러지 않으면 도저히 제가 왜 그들을 지켜야 하는지 모르겠으니까. 저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살아온 수호자들도 왜 자신이 인간을 지켜야 하는지 몰랐을 게 분명했다. 몰랐으니 알고 싶었을 테고, 생겨난 궁금증은 행동으로 옮기게 되는 법이었다. 인간에게 물어보면 답을 알게 될 것이다. 그들의 어떤 점이 사랑스럽고, 지켜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그러한 궁긍즘과 행동이 사헬라를 움직이게 했을 때, 그는 티르를 만나게 되었다. 자신을 바꿔줄 수 있는 인간 하나를. 첫눈에 반해 주변이 밝아지고, 꽃잎이 휘날리는 장면은 아니었다. 제대로 자른 게 맞는지 의문이 생길 법한 헤어스타일이나 어떤 삶을 살았을지 상상조차 되지 않는 흉터들. 용을 마주한 사람치고 두려움 없이 다가오는 행동마저 사랑스럽다기보다 이해가 가지 않는, 신기함의 감정이 우선적으로 들었다. 흥미를 갖는 건 다행스럽게도 저만의 일이 아니었나보다. 용의 모습으로 내려다본 인간은 작은 주제에 무어라 크게 떠들곤 해 결국 동일한 종족의 모습으로 그를 마주할 필요가 있었다. 그게 분명 첫날이었다. 희한한 인간, 이란 감상을 남기던 첫날. 용을 연구하고 싶다고 말하는 목소리에 들뜬 감정이 저에게까지 닿았던 첫날, 대신 인간들이 살아가는 세상을 보여달라고 부탁하게 된 첫날. 첫날의 변덕에 대해서 사헬라는 결코 변명할 여지가 없었다. 이는 분명 행복한 선택이었으나 현명하지 못한 선택이었다고. 말 그대로 티르를 처음 본 그날로 돌아간다면 똑같은 선택을 했을 터였다. 그때의 사헬라는 자신이 사랑하게 된 모든 것을 알고 싶었다. 그러기 위한 창구는 티르가 유일했고, 달라질 건 아무것도 없을 터였다.
티르가 알려준 세상은 사헬라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을 정도로 아름답고, 사랑스런 풍경이 가득했다. 모든 인간이 제게 다정하거나 아무런 사건사고 없이 평범한 하루를 보낸 건 아니었으나 깨닫게 된 사실은 많았다. 다들 각자의 삶을 지키고자 한다는 것. 그들 사이에 속하고 싶어. 인간이 되고 싶어. 제가 왜 용으로 태어났고, 수호자의 삶을 살아가는지 몰라도 인간의 모습을 모방할 수 있다면 그들 사이에 있어도 되는 일이지 않나. 홀로 지내던 숲 안은 어두웠고, 외로웠으며, 그저 헤맬 뿐이었으니. 수호자로서 해야 할 의무를 다한다면 그들과 섞여 사는 일이 어려운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사헬라는 결국 툭 하니 말하고 말았다. 선대가 저지른 죄를 이어가듯이, 그들 또한 인간이었기에 본능적으로 과거를 그리워하는 일처럼. 사헬라도 그게 전부였을 것이다.
'티르, 날 사람으로 만들어 줄 수 있나?'
그게 티르에게 얼마나 매혹적인 이야기로 들렸을지 사헬라는 상상도 못 할 터였다. 마법사가 아니었고, 연구자나 기록자 따위도 아니었다. 티르의 흥미를 이끌게 된 건 사헬라에게 있어 마냥 나쁜 상황은 아니었다. 의무만 저버리지 않으면 전부 괜찮을 줄 알았다. 그들은 몰랐다. 알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고, 어떠한 낌새도 없었다. 사헬라가 바라는 길로 향할수록 그들은 이별의 길을 걷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건, 한참 뒤에 알 수 있는 이야기였다.
지금 와서 말하자면 나라고 너를 밀쳐내고 싶었던 건 아니야. 너와 본 축제는 정말 아름다웠고, 인간들은 여전히 사랑스러웠지. 왜 나에 대한 건 누군가 알려줘서가 아니라 본능적으로 알게 되는 건지. 그때쯤 그만두면 되돌아갈 수 있을 줄 알았다. 신의 뜻은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모르겠던데, 그래도 나는 내가 수호자임을 포기하고 싶지 않았고… 인간들은, 정말이지, 내 존재가 처참할 정도로, 아름다운 존재들이었어.
이후에 있던 일에 대해서는 남길 수 있는 말이 없었다. 이미 약해진 사헬라를 황실 사람들이 붙잡는 건 쉬운 일이었다. 애초에 어떠한 저항을 할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티르의 말대로였다. 저는 의무를 저버리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했는데. 그거면 괜찮을 줄 알았는데. 인간이 되고 싶다는 욕심은, 수호자의 의무를 저버리는 일 그 자체였고, 티르에게 이를 부탁한 순간 되돌릴 수 있는 건 없었다는 것을…
시간이 흐른 후에 알 수 있었다는 게 억울하면서도,
999번째의 날, 난 네 품 안에 죽을 수 있어서 정말로 다행이었어.
둘,
티르를 다시 볼 수 있게 된 날을 기억한다.
그날은 인간이 되어 죽었다면 제가 그토록 원하던 인간의 삶에서 티르를 마주할 수 있는 날과도 같았다. 다만, 하루도 채 되지 않는 시간은 너무 짧기도 하여 저는 그에게 무얼 해줄 수 있을지 고민해야만 했다. 좀 더 제대로 된 인사를 할까. 너와 지내던 삶이 좋았다고 말해줄까. 네 품에 죽은 날이 후회되지 않는다고, 그 순간만큼은 자유로워진 내가 있다고 말해야 할까. 우리가 과연 지내 온 삶에 대해 긍정적인 감정만을 남기고 헤어질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은 어쩌면 당연한 건지도 몰랐다. 저와의 이별이 결코 티르에게 긍정적일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의 집에 도착하고 마주한 상황에서 해줄 수 있는 건 생각보다 몇 없었다. 티르는 제 생각보다 더 엉망으로 생을 이어가고 있었다. 그게 꼭, 제가 떠났기 때문에 엉망으로 살아가는 게 아니라 본래도 잘 치우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이란 걸 알게 되는 날이었다. 용으로 살면서 굳이 인간처럼 생활할 필요가 없던 저는 청소라거나 요리 따위와 거리가 멀었지만, 티르의 생활이 평범한 삶은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가 엉망으로 살아가지 않길 바랐다. 제가 있든 없든 그가 살아온 삶이란 게 있었을 테고, 그 삶으로 돌아가길 바랐을 뿐이었다. 이 또한 제가 인간이 되길 바라던 마음처럼 이기적인 마음이었나. 하지만 티르는 제게 있어서 살아가지 못한 삶을 살아가는 이였다. 그의 당당함이, 능청스러움이, 저와 너무나도 달라서. 그래서 보고싶었나보다. 제가 없어도 여전히 자신만의 길을 걸을 수 있는 당당함을. 뜻대로 되는 건 아무것도 없었지만. 물건을 하나하나 정리하며 떠올렸던 건 들뜬 마음으로 그를 마주할 거라고 예상했던 제 모습이었다. 제가 사랑한 인간 중에서도 티르는 유일했다. 제대로 말을 섞은 인간도, 제게 애정을 보이는 인간도 유일했기 때문에 저 또한 같은 마음을 가지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이를 말해주었다면 우린 싸우지 않았을까? 그의 심정을 모르는 건 아니었다. 저를 살리고 싶은 마음이 얼마나 간절한지 가늠조차 되지 않았다. 그게 미안해서, 그는 미안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했겠으나, 그게 오히려 더 미안해서. 얼마나 닿았을지 알 수 없어도 저 또한 티르가 죽지 않길 간절히 바랐다고.
그의 심정을 감히 예상하자면, 제게 미움받고 싶지 않은 마음이었을까. 그때, 우리의 다툼이 후회되냐고 물으면 이 또한 아니라고 답하겠다. 티르를 알게 되고, 지낸 시간이 길다고 말하기 아쉬워서, 나도 너하고 많은 걸 보고 싶었어. 제국의 삶뿐만 아니라 더 많은 삶을 보고, 지내고, 알아가고 싶었어.
단지, 네 목숨과 내 욕심 중에 고르자면 네 목숨이 먼저였을 뿐이지.
네가 내게 있어 특별했기에.
셋,
티르가 저를 살려내고자 한 날을 기억한다.
또다시 만나게 되어 기쁘다고 해야 하는 건지, 또다시 너를 끌고 오는 세상이 잔인하다고 해야 하는 건지, 제게서 영영 벗어나지 못하게 되는 네가 불쌍하다고 해야 하는 건지. 먼저 이야기를 꺼낸다면 기쁘다고 말해달라는 그의 모습이 훤해서 입 밖으로 내뱉지 못했다. 순수한 마음으로 기뻐하기가 영 어려웠기에. 탓할 수 있는 건 없다. 저의 잘못도, 그의 잘못도 아니지 않은가. 제가 있는 곳이 꿈속이란 건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티르의 꿈인지, 제 꿈인지 확신할 수 없었을 뿐. 그 누구의 꿈이라고 해도 서로가 서로의 꿈에 나오길 바랐을 테니 이상한 일은 아니라고 여겼다. 저를 살리겠다는 그를 보며 사헬라는 결론을 내려야만 했다. 죽고자 한 건 아니다. 그저 인간이 되었으면 했다. 하다못해 인간으로 죽고 싶었다. 용이라는 성스럽고 대단한 존재가 아니라 인간이 되어 동일한 시선으로 티르와 함께 세상을 바라보고 싶었다. 그저 이 욕심의 대가가 제 목숨이라면 수긍할 수밖에 없다고 여기며 스스로를 납득시켜야만 했다. 그렇지 않으면 너무 억울하지 않은가. 제가 무얼 그리 잘못해서 죽어야만 했냐고. 이 질문을 도대체 누구에게 해야 하냐고. 제 질문에 답해줄 사람이 있긴 하냐고.
사헬라는 몇 번이고 눈을 깜박거리며 제 앞에 존재하는 티르를 눈에 담았다. 그는 여전히 저를 보고 웃었고, 제가 이해하기 어려운 말을 했으며 종종 저 없이 안 될 아이처럼 굴었다. 그리 긴 시간 떨어져 있지 않았을 텐데. 제게 부리는 어리광이 어찌도 마음에 들던지. 제 물음에 답해줄 사람은 없다. 그렇다면 저는 왜 이곳에 있는지, 나아가고자 하는 방향을 알고 싶었다.
분명 방법을 찾을 수 있을 거네.
그러니 티르를 붙잡고 얘기했다. 저는 이곳에 대해 아는 게 없다. 눈을 떴을 때, 침대 위였고, 다른 이를 만난 적조차 없으며, 알아낸 정보조차 없다. 하지만 확신해서 말할 수 있었다. 저를 끝끝내 잡아두고, 상대를 불러낸 일이라면 우리가 올바른 길을 가야 한다는 걸.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는 게 분명하다고. 저도 다시 죽거나 티르를 영영 못 보게 되길 바라는 건 아니다. 알아낼 수 있는 정보가 있다면 전부 전해주고 싶을 정도로, 아무것도 모르는 자신이 한심하기만 하다. 하지만 티르는 중요한 순간에 제게 져주는 이였으니 이번에도 가능할 거란 믿음이 있었다. 그때처럼 싸우는 게 아니라 제 말에 귀 기울여 준다면. 우리는 진실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나도 너와 보게 될 빛이 꽤 궁금해, 티르.
쉽게 끝낼 수 있을 거란 예상은 하지 않았다. 사헬라는 몸을 움직이면서 질투로 가득 찬 눈을 바라보았다. 사랑하는 연인을 떠올리며 상대의 목숨을 취하고자 하는 기분이란 어떤 기분일까? 저를 향해 주먹을 휘두르는 자가 누군지 몰라도 생김새 탓인지 자꾸 티르와 겹쳐 보였다. 그런 이유로 상대의 공격에 반격하지 못한 건 아니다만, 제가 그만큼 티르를 아끼지 않는 탓에 이해할 수 없는 감정인 건가. 아니다, 널 향한 내 사랑은 이런 게 아니다. 티르, 만약 네가 저 사람처럼 나를 살리기 위해 누군가를 해치고자 했다면 나는 정말 슬펐을 거다. 저 위치가 네가 아니라서 정말 다행이야. 이게 내가 널 사랑하는 방법이라고 그리 말하고 싶다.
모든 일이 끝나고 따스한 빛이 너와 나를 감싸면, 저는 또다시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이제 정말 끝났구나. 더 이상 제가 티르의 발목을 잡는 존재가 아니라 같이 걸어 나갈 수 있는 존재로 이곳을 나갈 수 있는 것이다. 그를 이런 곳까지 끌고 와 고군분투하게 만든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음에… 처음으로 신에게 감사함을 느낀다.
*
그때 이후로 온 적 없는 방인데도 익숙함이 느껴지는 건 이 방에 담긴 너의 온기가 제게 닿은 탓이다. 네 방을 치워주기 위해 찾은 적이 있었지. 그때는 이러한 상황까지 도달할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티르는 결국 제 말을 들어주었고, 우리는 제대로 된 인사를 했다고 생각했다. 제대로 된 작별인사. 그렇다면 이 상황에서 해야 하는 인사는 또 다른 것임을 알고 있다.
좋은 아침, 티르.
마치 지나간 나날이 꿈인 것처럼 그를 향해 인사의 말은 건넨다. 꿈과 현실이란 경계가 이리도 희미했던가. 제게 일어난 일이 현실인지 시선을 굴리면 자연스럽게 제게 닿아 있던 시선과 마주친다. 그러면 기다릴 것도 없이 제 말에 답을 하는 그가 있다.
잘 잤냐, 잠꾸러기 사헬라.
돌아오는 답에 환한 얼굴로 웃어 보인다. 그에게서 말 한마디 듣는 게 이리도 기쁜 일이었던가. 그와 지내며 겪었던 모든 순간에서 비로소 너를 마주한 듯한 기분이 들었다. 사헬라, 라는 인간으로 가장 특별한 티르, 라는 사람을. 너와 겪은 일에 내 감히 어떤 제목을 붙여야 하는지 도통 떠오르지 않았다. 너는 내게서 특별함을 바랐지. 너는 이미 내게 그 무엇보다 특별함이었는데. 특별하고, 사랑스럽고, 유일하고, 가장 아끼는 너에게 나는 감히 이 페이지를 건넨다. 우리는 이 앞으로 어떤 이야기를 같이 쓰게 될까.